[나는 예술가로 살기로 했다]의 저자 에릭 메이젤은 심리치료사이자 창의력 컨설턴트로 글, 그림, 음악 등의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해주고 그들이 더 나은 창작을 지속하도록 돕습니다. 이 책에서는 예술가들이 자신의 고뇌와 문제를 매우 솔직하게 다룹니다. 예술가들의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매우 흥미롭게 느껴질 것이고, 자신이 예술가라면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넋두리에 가까운 가벼운 고민부터 삶과 예술관에 대한 깊은 고뇌까지 타인의 다양한 문제들을 들여다보는 게 꾀나 재밌습니다.
예술가들은 그들이 자신의 창작물로 생존이 가능한 궤도를 타기 전까지 공통적으로 몇 가지의 아주 큰 문제를 직면하게 됩니다. 생존의 문제, 미래에 대한 불안함, 이상과 현실의 괴리, 시간과 공간의 문제, 자기 비난, 타인의 비판, 창작 욕구는 있지만 창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등. 그리고 저마다의 장애물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글/그림/음악 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현실 앞에서 절실하고 거절 앞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문제와 함께 답까지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요. 저는 예술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걸 그래서 좋아합니다. 모순 그 자체인 점이 마음에 들거든요.
이 책의 좋은 점/아쉬운 점
저자의 컨설팅 방법이 흥미로웠는데, 예술가들이 문제를 늘어놓으면 그에 대한 해답을 바로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닌 예술가 스스로가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고 진짜 원인을 파악해 내고 해결방법까지 직접 찾아가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저자가 소위 '예술가'의 성격을 아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예술가는 때론 불안하고 흔들리지만 대부분 확고하고 꺾이지 않는 사람들이니까요.
다만 예술가라고 하기엔 아직 너무 초기 단계의 고민을 늘어놓는 예비 예술가들의 고민 내용 많았고 (그런 질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 또한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답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쇼잉업 하기 위한 장황한 이메일을 쓰고 있는 예술가의 비중 또한 꾀나 많았다는 것입니다. 작가의 구체적이고 뼈 때리는 조언을 스승 삼아 더 나아지고 싶었던 저에게는 다소 약한(?) 처방에 아쉬움이 남았던 거 같습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으른 창작자인 저는 뼈를 맞아버렸으니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내용 몇가지를 공유하려 합니다. 창작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예술가들의 문제와 그들이 찾은 답을 크게 5가지로 정리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술가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작곡을 하는 건, 그들이 그러기로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그림과 글과 음악을 할지는 누군가가 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내 그림을 컬렉팅 하고, 어떤 편집자가 내 글을 출판하기로 마음먹으며, 누가 내 음악에 감동받을지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예술가들은 자신이 그것을 할지 말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 순간에도 순식간에 흘러가버립니다.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기를 미룬다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죠. 심지어 잘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할 건지 말건지를 골라야 합니다. 그게 예술하는 일의 시작입니다.
일단 골랐다면 선택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옳은 선택이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술가 스스로도요. 선택이 옳았는지 증명되길 기다린다면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선택을 했다면 스스로를 믿고 창작을 하면서 매 순간 자신이 내린 선택이 옳을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옳은 선택을 했음을 스스로 증명해 내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그려야 세월을 낭비한다는 죄책감을 예방할 수 있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겠지만 그림은 연속성 안에서 힘이 생깁니다. 오늘 그려야 내일도 그릴 수 있고, 습관처럼 그려야 슬럼프에 빠지지 않습니다. 매일 그리지 않으면 '내일은 꼭 그려야지' 함정에 빠져 다시 연필을 들기까지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죄책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는 게 아니라 불안과 함께 점점 커집니다.
매일 그려야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고 오늘도 잘 해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의 죄책감을 쌓지 않아야 작업물은 쌓입니다. 다음 그림에서는 얼마나 더 발전할까 하는 기대와 재미로 매일을 채우다 보면 세월만큼 그림도 쌓일 것입니다. 매일 해냈다는 자기 효능감도 쌓이고요. 매일 그리면 아이디어도 더 많이 생깁니다.
실력이 늘고 있는지, 작업의 방향은 이게 맞는지 의심이 들고 의구심이 생기더라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멈추면 다시 시작할 때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의심은 확신으로 변할 것입니다. 하나하나 해치우는 것 말고는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지워버리세요. 나 자신이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중요한 건 하나를 선택하고, 그걸 매일 꾸준히, 정성을 다 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술가도 인간이기에 매일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정서적으로 혼란스러웠을 수도 있고, 동기가 결여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간단한 계획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하기만 한다면 어디서든 그릴 수 있다
누구도 자신이 사는 곳과 작업하는 곳의 현실을 부정할 순 없습니다. 장소가 창의력에 많은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에게는 언제나 딱 알맞은 장소와 시간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스위치만 키면 바로 창작이 가능하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스위치를 켜서 창작에 몰입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원하기만 한다면 어디에서든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굳이 천장이 높은 작업실과 모든 재료가 갖춰지지 않은 환경에서라도요. 사실 저도 남들 앞에서 그림 그리는 걸 싫어합니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으로 나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터득하면 작가로서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더 이상 딱 맞는 환경이라는 제약을 받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림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다
공부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그림은 배워야 할 양이 방대합니다. 심지어 취향의 영역이라 뻗어나가는 갈래만해도 수십 가지이고요. 모든 걸 다 공부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자꾸 기초가 부족해서 그렇다며 공부로 돌아가려는 관성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모작을 하건, 그림에 대한 책을 읽건, 그림 공부는 참 재밌습니다. 일단 그렸다는 결과물이 눈에 보이고 지적으로 풍부해진 느낌도 듭니다. 하지만 공부하는 건 예술하는 게 아닙니다. 공부는 필요한 걸 보충하는 거지 공부 자체가 돈이 되진 않습니다. 어쨌든 예술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예술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예술 공부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논문을 쓰거나 방법론을 판매한다면 모를까요) 개인적인 성취감이 돈이 되지 않았다면 그것 말고 수입이 보장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다
예술가에게 돈 문제는 빼놓을 수 없는 문제겠죠.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일을 주지 않는 예술가는 스스로를 먹여 살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후원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술가가 직업인데 예술만 하면 안 되냐고요? 그게 되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투잡 아니 쓰리잡까지 해야 겨우 재료비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일이 있다면 닥치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죠.
'돈 버는 일을 안해도 된다면 더 창의적인 작품활동에 매진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예술가들이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일 겁니다. 종종 예술가들은 하고 싶은 예술과 하기 싫지만 돈이 되는 예술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저자의 대답은 '둘 다 하라'입니다. 예술가는 예술을 하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이 두 가지 프로젝트를 '모두 하기로 선택'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돈을 벌어야 먹고살 수 있습니다. 예술도 먹고살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다만 돈을 벌어야 먹고살 수 있다는 핑계를 예술을 하지 못할 핑계로 써먹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칭하면서 그렇게까지 많은 시간을 예술을 고민하고 실행하는 데 쓰지 않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돈 버는 일도 마찬가지고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먹고살기 위해 쓰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술을 못할 정도로요.
예술엔 소위 말하는 '공식'이 없습니다. 공부로의 끊임없는 회귀는 어떻게 보면 자신감 결여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그토록 찾아 헤매는 결정적 정보나 결정적 조언은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고통스럽지만 워크숍과 클래스는 해답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비판과 거절은 당연하다
예술가의 일 자체가 그렇습니다. 평가받고 비판과 거절을 당하고 퇴짜맞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상처를 빨리 회복하고 다시 예술하는 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비판받는 일은 과정일 뿐이지 비판당한 대상이 나 자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경험이 많더라도 대중 앞에 창작물을 내놓는다는 건 무서운 일입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무대공포증에 시달리고 전시장에 그림을 걸며 발가벗겨진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노출을 두려워하고 비판과 거절에 메여있다면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적당한 때란 없는 거 같습니다. 완벽한 것도 없습니다. 완벽을 꿈꾸며 창작을 한다면 그건 이뤄질 수 없는 꿈을 꾸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매일을 고통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죠. 사람들은 완벽한 걸 보기 위해 예술을 찾는 게 아닙니다. 그 누구도 이것이 완벽하지 않아서 가치가 없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조금은 자신을 내려놓고 가볍게 비판과 거절을 당해보는 게 어떨까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창작물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는 그 무엇도 그 작품의 아름다움과 가치와 만족도를 우리 기대치만큼 충족해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현실과 꿈의 괴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우리의 몸을 마비시키지 않는가? 텅 빈 캔버스 앞에서 완벽한 작품을 상상하지만 현실의 붓질은 결코 그런 완벽함을 허락하지 않으니, 많은 화가들이 이런 문제로 고뇌를 거듭한다. 우리는 우리의 그림과 글과 음악이 기적을 만들어내기를 꿈꾼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발길을 좀처럼 용납하지 않는 영역임을 알아야 한다.